입김이 하얗게 모였다가 둥그렇게 흩어진다. 그 위로 눈송이가 한숨처럼 스쳐간다. 겨울이다.
제로페는 언 손을 코트자락에 부비려다가 그만두었다. 그건 영 가오가 살지 않는 일이고, 이 날씨에도 거리에는 끊이지 않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으므로 제로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대신 손을 주머니에 끼워넣었다. 그것도 코트 끝에 눈송이가 몇 개 매달려 있었으므로 썩 만족스러운 온기를 제공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아까보다는 나았다. 귀가 시린 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벤치에 눈이 쌓일 정도의 날씨는 아니라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로페가 라이덴을 기다리기 시작한지는 두 손으로 꼽을 정도의 시간이 지나지는 않았으나 날씨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추웠다. 아마 크리스마스라는 이름이 그를 평소보다 조금 더 들뜨게 한 모양이었다.
후훗... 나도 참...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들뜬 여자라니깐...ㅎㅎ
제로페의 인생에서 기다림이란 꽤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럴 일은 별로 없었다. 그야 라이덴은 그를 기다리게 하는 성격도 아니고 어느 쪽이냐면 오히려 라이덴이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쪽을 선호하니까. 솔직히 그의 입장에서야 돌아간 집이 따뜻하고 맞이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좋지만 가끔은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저희 집 강아지가 바깥에 나가는 걸 싫어해요. 모름지기 건강한 강아지라면 산책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래야 되는 거 아닌가... 제로페는 라이덴이 건강하길 바랐으므로 오늘은 일부러 밖에 일을 만들어 내보냈다. 거기엔 약간의 속셈도 있긴 했다.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아마 라이덴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크리스마스? .........아, 성탄절. 알지. 예수가 어쩌고 저쩌고 축하하는 날. ........... 그런데 그게 왜? ... 응? 제로? 화났어? 뭔진 모르겠지만 미안해... 화 풀어... 뭐, 화는 안 났으니까 괜찮다. 레이라면 그렇게 말할 거라는 거 이미 다 예상했으니까. %%. 예수가 죽었든 살았든 제로페한테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 그것은. 크리스마스. 연인들의 특별 이벤트 데이라는 것.
이런 날엔 데이트를 해야 한다. 그리고 집에서 같이 손잡고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진짜 데이트는 모름지기 밖에서 만나야 된다. 두근두근. 당신을 기다리며 조금씩 가슴 설레는 시간. 약속장소에 한발짝 더 가까워질 때마다 고동치는 심장. 나, 오늘 데이트, 기대하고 있는지도. 이런 것들이 데이트의 본질이니까.
"... ...제로."
그러나 정작 라이덴이 도착했을 때 제로페는 잠시 언어를 잃어버렸다. 그건 당신이 달랑 와이셔츠에 조끼 하나를 입고 추위를 감지하지 못하는 안드로이드처럼 손목을 걷어올리고 있어서도 아니고, 갑자기 이능력이 도져서도 아니었고, 그냥... 흩날리는 눈이 내리는 골목. 따뜻한 조명을 배경으로 한 채, 부드럽게 기울어지는 갈색 머리.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녹색 눈동자. 제 이름을 속삭이는 입술. 통틀어 라이덴의 모습이 끝내주게 잘생겨서였다. 제로페는 생각했다. 와. 대박. 이거 내 남자? 진짜 장난 아니다. 내가 잘생긴 얼굴을 꽤 좋아한다는 사실은 알았는데 이건 좀 충격. 나 얼굴 이렇게 밝혀? 외모가 세상의 전부야?
아무튼 제로페가 새삼스레 그의 얼굴에 충격을 받든 말든 라이덴은 제로의 손을 녹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안 했을 수도 있는데, 위로 스크롤해서 그림을 보면 라이덴이 손kiss를 하고 있으므로 아마 이러저러한 생각의 과정 끝에 손이 차가워 보인다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결과적으로 제로페에겐 잘 된 일이었다. 가까워진 숨결에 제로페의 심장이 뛰었다. 순간적으로 추위라는 개념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그리고 제로페가 입을 열었다.
"바보."
갑작스레 쏟아진 힐난에 라이덴이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쳐다보거나 말거나 제로페는 갑자기 이런 소리도 덧붙였다.
"레이 너... 날 사랑하나 봐."
바보네. 바보바보. 여기까지 걸어와서 자기 손도 차가운 주제에 내 손부터 녹여줘야겠다고 생각하는 바보. 자기 체온 낮은 줄도 모르고 냅다 손을 감싸쥐고 있으면 녹을 거라고 생각하는 바보. 졌다. 완전 패배. 이 남자에게 이길 수 없어. 너무 좋아. 귀여워 죽겠어. 제로페는 오늘 XX와 XXXX를 해서 XX한 다음 완전 XX해서 라이덴을 눈이 튀어나오게 서프라이즈해야겠다는 본래의 계획을 새카맣게 잊어버리고 실토했다.
"우리 오늘 크리스마스 데이트야."
자신의 앞에서만 둥글어지는 눈이 의문을 담고 제로페를 바라보았다. 풀색. 여름밤 풀벌레 우는 색. 그 눈동자가 좋아.
"저 앞에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트리 세워놨어. 그거 보러 갈 거야."
가로로 난 흉터 위로 세로로 늘어진 앞머리. 부슬부슬한 머리카락. 손가락으로 감싸쥐면 가닥가닥 얽혔다가도 허물어지는 머리카락. 그 머리카락이 좋아.
"그 앞에는 축제 음식도 팔아. 과자도 사고 수프도 먹을 거야. 레이가 좋아하는 고기도."
손. 흉터로 가득한 손. 날 사랑한답시고 바보처럼 내 손을 쥐고 있는 차가운 손. 화상자국도 유리조각에 찔린 자국도 제대로 치료 안 하려고 들어서 울퉁불퉁해져버린 손. 그 손도 좋아.
"그리고 겨우살이 밑에서 키스할 거야."
마지막 말은 거짓말이었다. 왜냐하면 제로페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라이덴을 잡아당겨 키스했기 때문이다. 상대를 바로 앞에 두고도 키스를 참는 건 바보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거짓말이 아닐 수도 있겠다. 겨우살이 그늘 아래 라이덴을 보고 키스를 참을 수 있는 제로페는 없을 테니까.
"넌 크리스마스 같은 거 관심 없겠지만 괜찮아. 내가 지금부터 좋아하게 만들어 줄게. 네가 매일매일을 더 사랑하게 만들거야. 행복해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를 만큼."
그렇지만 넌 그 중에서 나를 가장 사랑해야 해.
제로페는 여유롭게 웃었다. 시간은 충분하고 그는 자신이 있었다. 그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물론 이 모든 일은 제일 먼저 라이덴에게 겨울용 모직코트를 사준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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