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아님, 사일라흐x아웃캐스트 연성, 아웃캐스트 관련 다량 스포
수색이 붉게 타올랐다. 잔을 가볍게 흔들면 이윽고 검게 물든다. 언제나 보는 풍경이지만 늘 아름다웠다. 어딘가의 사무실에서 이 작은 찻잔에 꽃을 피워올리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로도스 아일랜드에 들어온 뒤에는 그럴 여유가 적었다. 다른 오퍼레이터들에게 대접하는 일은 잦았어도 혼자서 문득 차를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꽤 오랜만이다.
꺼내올린 티백에서 붉은 물이 찻잔의 둥근 외곽을 따라 흘러 떨어진다. 훈련이 끝나고 방으로 돌어왔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제인은 혼자서 마시는 차에 물주전자를 올리기는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고, 또 이 평화로운 소음으로 이미 잠에 들었을 다른 동료들을 깨우고 싶지는 않았다. 티백의 꽁지에는 익숙한 빅토리아어가 적혀 있었다. 제인은 온도가 조금 식는 걸 기다리며 그 단어를 읽었다. 레이디 그레이. 단어를 전부 읽고 났을 때, 제인은 문득 자신이 버릇처럼 상대방의 자리에 찻잔을 데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마도 그간 손님맞이에 익숙해진 탓이라며 따끈해진 찻잔의 물을 버리려고 몸을 일으켰을 때,
마법처럼 노크가 울렸다.
처음에 제인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기대 앉은 의자의 등받이는 복도 쪽의 벽면과 맞닿아 있고, 그러면 제인의 방에 찾아오기 위해 복도를 건너오는 모든 이들은 으레 방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제인의 환영인사를 듣기 마련이다. 보안상의 이유라든가 하는 그런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제인은 이 작은 테이블에 앉아 창 밖의 풍경을 보기 위해 의자를 정 반대 방향으로 돌려 놓았고 그것이 우연히 발걸음 소리를 전달해주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방금 들은 소리는, 아마도 아래층에서 뭐, 클로저가 실수로 함선의 주요한 부분을 조금 두드렸다든가, 그런 소리가 아닐까 생각했을 뿐이다. 그러나 두 번째로 노크 소리가 들렸을 때에는 판단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시간에,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제인은 별달리 로도스 아일랜드의 안전성을 의심해본 적은 없었지만 군인으로서의 감은 무시할 것이 못 되었다. 특히 제인처럼 사선의 가장 가까운 경계에서 오가던 사람에게는. 제인은 여차하면 쓸 요량으로 등 뒤에 감춘 손에 뜨거운 물병을 꽉 쥔 채로 슬그머니 문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허락받고 들어오려고 했는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그만 몸이 굳고 말았다.
"…기다림이 너무 길어서 말이지. 가까운 길은 아니었거든, 긴 길을 쉬지도 않고 달려온 손님에게 이 정도는 대접해줄 수 있겠지."
제인은 애써 고개를 돌렸다. 희끗한 새치가 머리칼 사이에 배어 회색으로 보이는 산크타 한 명이 느긋하게 기대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 제인이 앉아서 차를 따르던 맞은편에. 익숙하게 찻잔에 설탕을 붓고 잔을 휘저은 그녀는 정말 장거리 여행에 지친 사람마냥 다급하게 찻잔을 입에 대곤 기분 좋은 얼굴로 제인을 칭찬했다.
"아, 여전히 맛있군. 이게 정말 마시고 싶었어. 이렇게 차를 잘 끓이는 사람은 드물거든."
"감…감사합니다."
상황이 어떻든 칭찬을 들으면 답을 해야 하는 제인의 입이 떨떠름하게 벌어졌다. 그쯤 되고 나니 더 이상 문간에서 굳어 있기도 어려웠다. 뻣뻣해진 몸을 움직여, 산크타의 맞은편, 손님을 맞을 때면 언제나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몸을 올려놓고 나자 모든 것이 조금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제인은 아직까지도 힘주어 쥐고 있던 물병의 뚜껑을 열고 이 갑작스러운 불청객의 찻잔을 다시 채워주었다.
"고마워. 너의 그 상냥한 성격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네. 그런 점이 너를 더 돋보이게 한다고 생각했지만…"
"아웃캐스트 씨…"
제인은 자신의 목에서 흘러나온 발음에 놀랐다. 한동안 입 밖으로 내어볼 일이 없던 이름이었다. 그런데도 이토록 자연스러운 발음이라니.
"빅토리아식 사과 파이를 맛보기엔 약간 이른 시간에 도착하긴 했지. 그건 확실히 아쉬워. 난 디저트를 정말이지 좋아하거든…"
산크타는 다시 한 번 홍차로 목을 축이면서도 제인을 향해 친숙하게 윙크했다. 그 태도 전부가 너무나 일상적인 사람의 그것이라서 제인 역시도 무심코 분위기에 젖어드는 기분이 들었다. 속절없이 휘말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제인은 멍하니 미니 냉장고에서 잼이 가득 든 크럼블을 꺼냈다.
"그, 파이는 없지만… 크럼블이라면 있어요. 구운 지 조금 지나긴 했어요. 저번 주에 요리 동호회가 있었거든요…"
"잘 적응한 모양이야. 하긴 이렇게 훌륭한 과자를 거절할 사람은 함선 안엔 없으니까."
"과찬이세요…"
그녀가 문장을 하나 마칠 때마다 방 안이 조금씩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제인에겐 산크타가 마치 태양 같았다. 그건 아마 산크타 위에 떠올라 있는 백열등이 실제로 방을 환하게 비추고 있어서인지도 모르지만.
"이런. 그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네. 날 보고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물론 내가 방금 이 크럼블을 반이나 먹어치우기는 했지만…"
"보고 싶었어요."
다급하게 튀어나온 대답에 회색 여성이 웃었다. 그 얼굴에는 묘한 효능이 있어서 제인도 따라서 조금 웃었다.
"이제야 방이 좀 환해졌네."
"방은, 당신이 들어왔을 때부터 환했는걸요…."
산크타식 농담으로밖에 들리지 않는 말이었다. 이 산크타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온화한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잘 지내요. 로도스 아일랜드의 모두가 좋은 분들인걸요. 당신이 가장 잘 아실 테지만요… 그러니까 이번에야말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 이야기라…"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까지는 홍차 한 모금 정도의 침묵이 있었다.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미야에게서 전부 들었잖아. 나처럼 은퇴한 늙은이에겐 재밌는 이야깃거리라곤 지나간 세월 뿐이지.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뭐가 중요하겠어? 무엇도 영원하진 않은데."
"그래도요. 심지어 전에 해 주셨던 이야기는 당신의 것도 아니었잖아요…"
"너라면 몰라도 그 친구에겐 비밀로 했으면 했는데."
"비밀로 할게요."
산크타는 열정적인 학생처럼 이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제인을 보고 손에 남은 크럼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
"그럼 모처럼이니 짧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줄까. 이건 내겐 꽤 인상적인 일이었지만, 네겐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는 아닐 수도 있어…."
제인은 상관 없다는 듯 상대의 잔을 한 번 더 채웠다.
"나는 여러 번 말했지만 단 것을 좋아해. 이것만큼은 산크타로 태어나서 버릴 수 없었던 유일한 것인지도 모르겠네… 와파린, 알지? 나한테 여러 번 경고했거든. 디저트는 줄이는 편이 좋겠다고. 아, 지금 먹는 이건 디저트가 아니라 한 사랑스러운 아가씨의 정교한 작품이니까 문제 없어, 그렇지?"
한없이 진지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이던 제인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대는 조금도 신경쓰지 않았다. 방금 내놓은 설탕 박힌 스콘을 입으로 가져가는 것은 덤이었다.
"한두 번쯤은 귀담아 듣기도 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역시 완전히 끊는 건 어렵겠더라고. 그런데 이게 실은, 역시 그만둘 수 없었던 계기가 있단 말이지."
반쯤은 저 스콘을 뺏어들고 싶은 마음과 저렇게 진심으로 즐기는 얼굴을 도저히 방해할 수 없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제인과는 달리 손님은 몹시 느긋한 태도로 당분을 대량 흡수하고 있었다.
"난 한 도시로 가던 중이었어… 황야를 꽤 길게 헤매야 했지. 모래바람 사이를 뒤적이는 건 썩 추천하고 싶은 경험은 아니지만 뭐, 못할 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어. 사흘 밤낮을 내리 움직이다가 처음으로 들렀던 가게에서 초콜릿 머드 케이크를 맛보기 전까지는 말이지. 그 케이크는 정말로…"
갑자기 매우 심각한 얼굴을 한 그녀가 양 손으로 깍지를 껴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제인도 덩달아 숨을 죽였다.
"맛이 없었어."
"?"
"끔찍했다고."
제인이 자신이 들은 문장을 곱씹는 와중 산크타는 몹시 침착한 목소리로 그 케이크의 맛을 묘사했다.
"카라멜은 이 사이에 엉겨붙지. 껍질도 덮지 않고 냉장고에 한 달은 방치한 것 같은 초콜릿에선 쉰 맛이 나고, 퍽퍽한 밀가루는 씹기도 전에 부서져서…."
"아니, 아뇨, 믿지 않는 게 아니고요, 그게 어떻게 디저트를 더 좋아하는 계기가…"
"됐지. 왜냐하면 그 직후에 내가 대접받았던 바노피파이는 정말이지 라테라노에서 내가 먹었던 어떤 파이보다 맛있었거든."
제인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건 일어선 산크타의 광륜이 아까보다 더 새하얗게 보여서도 아니었고, 그녀의 흰 눈이 부드럽게 자신을 응시하고 있어서도 아니었으며, 창 밖에서 새벽을 깨는 느닷없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 때문도 아니었다. 그저, 그냥…
"제인."
이름이 불렸을 때 제인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닳은 장갑 끝이 부드럽게 자신의 머리카락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자랑으로 여기는 반짝거리는 금발도 그것에 비하면 그저 낡은 책의 찢어진 종잇장 같았다. 제인은 그 손이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팔을 뻗어 붙잡았다.
"가시려고요?"
"그래."
"제게 가르치셨잖아요…"
"그래, 너는 배웠고."
"그럼 왜…"
"알잖아."
제인은 대답할 수 없었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한참 뒤쳐진 것 같더라도 그녀의 등 뒤를 따라 걷는 자신만큼은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그 빛에 이끌려 여기까지 왔다. 그럼에도…
"가지 마세요…"
산크타는 가만히 그녀를 보았다. 정확히는 그 뒤에 펼쳐진 익숙한 사무실의 풍경을 보았다. 자신이 앉아 보내던 자리에 제인이 있었다. 솔직히, 그녀는 그걸로 충분했다.
"또 올게."
그 말을 제인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제인이 가장 믿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제인은 손을 놓았다.
유령은 가볍게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곤 등을 돌렸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지만 문고리를 돌리고 방에서 나가는 일련의 모든 행위는 어제 여기에서 떠난 사람마냥 자연스러워서, 감히 당신을 유령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게 했다. 딸깍거리는 소리 두 번, 찰칵 소리 한 번. 문이 닫힌다.
방의 주인은 떠난 이의 흔적을 좇아 무심코 창 밖을 보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그녀는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흐느꼈다.